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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를 경계로 삼고 남은 왜(倭)와 접경하였다. 면적이 사방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토착민으로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아 비단을 만들었다. 각각 우두머리(長帥)가 있어 세력이 강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고 하고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며 성곽은 없었다.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 國), 신분고국(臣 沽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目支國 ?),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고(또는 점?)비리국(古(占?)卑離國), 신흔국(臣 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 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 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고랍국(古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국(不斯 邪國), 해지국(奚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 등 50여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통치한다. 신지에게는 신운견지보 안사축지분 신리아불례 구사진지렴(臣雲遣支報安邪 支 臣離兒不例狗邪秦支廉)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관직으로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伯), 장(長)이 있다.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으로 나라를 빼앗겼다.

 위략(魏略) : 옛날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연(燕)이 스스로 높여 왕이 되어 동쪽으로 땅을 침략하려 함을 보고, 역시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며 병사를 일으켜 연을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大夫)인 예(禮)가 간하여 중지하였다.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이 계획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 뒤 자손들이 교만하고 사나워졌으므로 연은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서쪽을 공격하였다.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약해졌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아우름에 이르러 몽념(蒙恬)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 때 조선왕 부(否)는 진이 자기 나라를 습격할까 두려워 책략으로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이 된 지 20여 년에 진항(陳項: 진승과 항우)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연,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점차 준에게 도망갔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와서 살게 하였다. 한(漢)나라에서 노관(盧 )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로 경계를 이루었다.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였다. 오랑캐의 복장(胡服)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가 항복하였다. 서쪽 변방에 살게 하여달라고 청하면서 중국에서 망명하는 사람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藩屛)으로 삼을 것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로 삼고 규(圭)를 하사하여 백리의 땅을 봉해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만이 망명해 오는 사람을 꾀니 그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위만은 준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말하엿다. "한나라 군사가 열 군데 길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지키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되돌아가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좌우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를 건너 한(韓)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하였다.

위략 :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그대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이 때문에 한씨(韓氏)라고 성을 썼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후손은 멸망하였으나 자금 한인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한나라 때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朝謁)하였다.

  

위략: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가 되었다. 그들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蕃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의 지황(地皇) 연간(20-22)에 염사착(廉斯 )이 진한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다.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이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도망가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살던 읍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1명을 만났다. 그 사람의 말은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물어보니 남자가 말하였다. " 우리들은 한(漢)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호래(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 명이 나무를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 모두 머리를 깍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착이 물었다. " 나는 한나라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가지 않겠느냐" 호래가 좋다고 말했다. 착은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하니, 군에서 착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 호래 등을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 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착이 이에 진한에게 따졌다. "너희는 5백 명을 돌려보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 너희를 공격하겠다." 진한에서 말하였다. "5백 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다." 진한 사람 만 오천 명과 변한포(弁韓布) 만 오천 필을 내놓았다. 착은 그것을 거두어 곧바로 돌아갔다. 군에서는 착의 공을 표창하여 관책(冠 )과 전택(田宅)을 주었다. 또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안제 연광(延光) 4년(125)에 이으러 부역을 면제받았다.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기에는 한과 예과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 후한 헌제의 연호, 196-22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이 뒤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경초(景初 : 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풍속은 의책(衣 ) 입기를 좋아한다. 하호(下戶)들도 군에 인사드리려고 갈 때에 모두 의책을 빌려 입는다.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 하여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주었다. 관리의 말을 통역하는 전하는데 다름이 있어 신지(臣智)와 한(韓)이 격분하여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당시 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준은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 그 풍속은 기강이 적다. 국읍(國邑)에는 우두머리(主帥)가 있지만 읍락에 섞여 살아 통제가 잘 되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 拜) 또한 없다. 초옥(草屋)에 토실(土室)을 지어 사는데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문은 위에 있다. 온 식구가 그 속에서 함께 살며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분별이 없다.  장례에는 널(棺)만 쓰고 덧널(槨)은 없다. 소, 말을 탈 줄 모르며, 모두 장례치를 때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금, 은, 비단(錦繡)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를 틀어 상투를 한 것이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다. 베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 안에 공사가 있거나 관가에서 성을 쌓을 때는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새끼줄로 한 발(丈)이나 되는 나무를 꿰매고 온종일 외치며 일을 한다. 아파하지도 않으며 그것으로 일 잘하고 건장한 것으로 여긴다. 해마다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모여서 노래부르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라 땅을 밟고 손발을 들었다 내렸다 한다. 그 가락의 율동이 마치 탁무(鐸舞)와 비슷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 뽑아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그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別邑)이 있어 소도(蘇塗)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도망해 온 사람이 그 가운데 들어가면 잡지 못했으므로 도둑질을 좋아한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쁨은 다름이 있다. 북방의 군과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조금 예속을 알지만 멀리 떨어진 지역은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별다른 진귀한 보배는 나지 않고 금수(禽獸), 초목은 중국과 같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크기가 배(梨)만하다. 또 세미계(細尾鷄)가 나는데 그 꼬리 길이는 모두 5척이 넘는다. 남자들은 때로 문신을 한다.  또 주호(州胡)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키가 조금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오직 가죽옷을 입으며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위만 있고 아래는 없기 때문에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진한(辰韓)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 마한이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라 하였다.
그 곳에는 성책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잔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나라 사람과 흡사하니 단지 연나라 제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그 중에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을)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 여섯 나라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누어졌다.

  

 변진(弁辰)

변진도 12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기저국(己 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해국( 奚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 미오야마국?), 여담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변진구사국(弁辰狗邪國 구야국?),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사국(弁辰安邪國 혹은 馬延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사로국(斯盧國), 우유국(優由國)이 있어서 변한과 진한의 합계 24국이나 된다. 이중에서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신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위략 : 그들은 옮겨온 사람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며 소와 말을 탈 줄 안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사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위략 :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 쌓아서 만들기 때문에 감옥과 흡사하다.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낙랑, 대방)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그 나라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과 같고 연주하는 음곡도 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도 진한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라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보병 전투를 잘 하며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들의 풍속에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이 모두 길을 양보한다. 변진은 진한 사람과 뒤섞여 살며 성곽도 있다. 의복과 주택은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을 달라서 문의 서쪽에 모두 조왕신( 神)을 모신다.
 그 중에서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2국에 왕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장대하다. 의복은 청결하며 장발로 다닌다. 또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관습은 특히 엄준하다.

 

 (편찬자 진수는) 평한다.
사기 , 한서에서 조선과 양월(남만, 동월)을 기록하였고 동경(후한)시대에는 서강(西羌)에 대해 찬록하였다. 위나라 때부터 흉노가 쇠약해지자 다시 오환과 선비가 나타났다. 이어 동이에 이르러서는 사신이 늘 왕래하여 사건에 따라 기술하였으니 어찌 범상한 일이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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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濊)

 예는 남쪽으로 진한(辰韓), 북쪽으로 고구려,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다.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는 2만이다. 일찍이 기자가 조선에 가서 8조의 가르침을 만들어 가르치니 문을 닫아걸지 않아도 백성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 세(世)를 지나 조선후 준이 분수를 모르고 왕이라 일컬었다. 진승 등이 기병하여 온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연, 제, 조 지역의 백성 수만 명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상투를 하고 오랑캐의 복장으로 와 그 왕이 되었다. 한 무제는 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나눠 4군을 설치하였다. 이 뒤부터 호족(胡族)과 한족 사이에 점차 구별이 생겼다.
 대군장이 없고 한대 이래로 후, 읍군, 삼로의 관직이 있어 하호를 통치하였다. 예의 노인들은 옛부터 스스로 '구려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다.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가 모두 곡령(曲領: 목둘레를 둥글게 한 옷)을 입는다.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은화(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단단대산령의 서쪽은 낙랑에 소속되었으며 영의 동쪽 일곱 현은 (동부)도위가 통치하였다. 그 백성은 모두 예인이다. 그 뒤 도위를 폐지하고 그들의 우두머리를 봉해 후(侯)로 삼으니 오늘날 불내후는 모두 그 후예이다. 한말에 다시 구려에 복속되었다.
 예의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같은 성(姓) 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꺼리는 것이 많아 병을 앓다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 풍흉을 미리 안다. 주옥을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밤낮으로 술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지낸다. 읍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생구(生口:포로), 소, 말을 부과한다. 이를 책화(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가 3장이나 되는 창(矛)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보병 전투에 능숙하다. 낙랑의 단궁이 그 지역에서 산출된다. 바다에서는 반어피(半漁皮 :바다표범 가죽)가 산출되며 땅은 기름지고 무늬있는 표범이 많다. 또 과하마(果下馬)가 나는데 (후)한 환제 때 헌상하였다.  정시(위 제왕 연호)  6년(245)에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하여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니 불내후(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정시) 8년(247) 조정에 와 조공하였다. 황제의 명으로 봉작을 불내예왕으로 고쳐주었다.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군(郡)에 와서 인사를 올렸다. 두 군에서 전쟁이 있거나 조세를 거둘 일이 있으면, 바치게 하거나 사역을 시키는 것을 마치 (군의) 백성처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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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옥저(東沃沮)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닷가에 연해 산다. 지형은 동북간이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는 된다. 북쪽은 읍루( 婁), 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해 있다. 호수는 5천 호이다. 대군장이 없으며 읍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將帥)가 있다. 그들의 말은 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것도 있다. 한나라 초에 연의 망명자 위만이 조선왕이 되면서 옥저는 모두 복속하게 되었다. 한 무제 원봉 2년(기원전 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다.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夷), 맥(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이른바 현도 고부(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 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불내성(不耐城)에 치소를 두어 영동 7현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 옥저도 모두 현이 되었다. 건무(후한 광무제 연호) 6년(30년)에 변경의 군을 줄였는데, 도위도 이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현에 있던 우리머리(渠帥)로 모두 현후(縣侯)를 삼았다. 불내, 화려(華麗), 옥저 등의 모든 현은 전부 후국이 되었다. 이들 이적(夷狄: 오랑캐)들은 서로 침공하며 싸웠다. 오직 불내예후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조(功曹), 주부 등의 제조(諸曹)를 두었는데, 예인(濊人)이 모두 차지하였다. 옥저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들은 스스로를 삼로(三老)라고 일컫는다. 그것은 옛 현이었을 때 제도이다.
 나라가 작아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구려에 신속(臣屬)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 대인(大人)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大加)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 하여 맥(貊), 포(布), 어(魚), 염(鹽), 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 나르게 하였다.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동옥저의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보병 전투를 잘한다. 음식, 주거, 의복, 예절은 구려와 비슷하다.

 위략 : 그 나라의 혼인하는 풍속은 여자의 나이가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한다. 신랑집에서 맞이하여 장성하도록 길러 아내를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집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장례를 치를 때에 큰 나무 곽(槨 : 덧널)을 만든다. 길이가 10여 장이나 되며 한쪽 머리를 열어 놓아 문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체가 덮일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곽속에 안치한다. 온 가족을 모두 하나의 곽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이 숫자대로 살아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에 모양을 새긴다. 또 질솥에 쌀을 담아서 곽문 곁에다 엮어 매단다.

관구검이 구려를 토벌할 때 구려왕 궁(동천왕을 말함)이 옥저로 달아났다.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해 옥저의 읍락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3천여 급을 목베거나 포로로 사로잡았다.  궁은 북옥저로 달아났다.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한다. 남옥저와는 8백여 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읍루와 접해 있다. 읍루는 배고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한다.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왕기(王 )가 별도로 군대를 보내 궁을 추격, 동쪽 경계 끝까지 갔다. 그 곳의 사는 노인에게 물었다. " 바다 동쪽에 또 사람이 사느냐" 노인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어느날 배를 타고 동쪽으로 흘러가 한 섬에 도착하였다. 그 섬위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말을 서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습속은 해마다 7월에 동녀(童女)를 구해 바다에 집어넣는다." 또 말하였다. "바다 가운데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곳에는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 또 말하였다. "바다 가운데 떠올라 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다. 그 시체는 마치 중국사람 같고 입은 옷의 두 소매 길이가 3장(丈)이었다. 또 난파되어 해안에 밀려온 배 한 척을 잡으니 그 배에 있는 사람의 목 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 사로잡아 말을 걸어 보았으나 서로 통하지 않았고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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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夫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戶數)는 3만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 물(澗水)를 식수로 한다. 농사지을 좋은 땅이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은 음식을 아껴 먹는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 벼슬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 衣), 선인(先人)이 있는데,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동이의 옛말에 따르면,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한다.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족(族)이 있다.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졌다.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朝服)과 의책(衣 )을 받아갔으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 溝 )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관직을 설치할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자는 모두 고추가로 불린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 비록 왕은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嫡統)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 절노부도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대가(大加)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다. 그 명단은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마치 중국의 경(卿인)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것으로, 모임이 있을 때 좌석 차례에선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위치에는 앉지 못한다. 나라 안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앉아서 먹는 인구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나라 안의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부경( 京)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 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다. 길을 걸을 때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쓴다. (중국의) 책과 비슷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이한다. 나라의 동쪽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낸다.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풍속은 혼인할 때 말로 미리 정한다. 여자의 집에서 집 뒤에 작은 별채를 짓고 서옥( 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고 궤배( 拜-무릎을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신부 부모가 그 때서야 작은 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금,은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몸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모두 복속되었다.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구려는 대수(大水: 압록강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다.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작은 강이 있다.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小水:  佳江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 곳에서 좋은 활이  생산된다.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왕망(王莽) 초년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를 징벌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억지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을 넘어 도망한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살해되었다. 주, 군, 현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도( )에게 전가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우에게 칠 것을 명하였다. 우는 구려후 도를 만나자고 꾀어 목을 베고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삼국사기 유리왕 31년 기사에 따르면 장수 연비(延丕)의 목이 베이었다고 함)  왕망이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 8년(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이 보인다. 상제( 帝), 안제(安帝) 연간(106-124년)에 구려왕 궁(宮 : 태조왕)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므로 디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고 여겨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궁이 몰래 군대를 보내 현도를 공격하였다. 후성(侯城)을 불사르고 요수(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볍게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다 패하여 죽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삼국사기에는 백고가 태조왕의 아우 신대왕이다) 순제(順帝), 환제(桓帝) 연간(126-167)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였다.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熹平 : 영제의 연호, 172-177) 연간에 백고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공손탁을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해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때부터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헌제(獻帝)의 연호. 196-219)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각 하호 3만여 명을 이끌고 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가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다. 지금 고추가 박위거( 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공격하므로 현도와 요동이 힘을 합쳐 반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위궁(位宮이라 하였는데 이이모가 죽은 뒤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지금의 고구려왕 궁(동천왕) 이 바로 이 사람이다. 증조의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장정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자마자 역시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른다.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경초(景初: 위 명제(明帝) 연호. 237-239) 2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정시(正始: 위 제왕(齊王)의 연호. 240-248) 3년에 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5년에는 유주자사 관구검( 丘儉)에게 격파당하였다. 그 때의 사실이 검의 열전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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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부여(夫餘)는 장성(長成: 현재의 만리장성이 아닌 연, 진 시대 장성) 북쪽에 있는데, 현도(玄   )에서 천리쯤 떨어져 있다.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 婁), 서로 선비(鮮卑)와 접해 있으며, 북쪽에 약수(弱水:흑룡강)가 있다. 사방 2천리가 되며 호수는 8만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정주 생활을 하며 궁실과 창고 및 감옥을 갖추고 있다. 산릉(山陵)과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 적당하지만 오과(五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노략질 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군왕이 있고 모두 여섯 가축 이름으로 관명을 정하여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 加), 구가(狗加), 대사(大使, 혹은 犬使), 대사자(大使者, 혹은 犬使者), 사자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豪民)이 있고 하호(下戶)라 불리는 백성은 모두 노복이 되었다. (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  다른 판본에서는 名이 民으로 되어 있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제가(諸家)들은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 가이며, 작은 곳은 수백가였다.
 음식을 먹고 마실 때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회합을 가질 때에는 술잔을 주고(拜爵) 닦는(洗爵)하는 예(禮)가 있고, 출입할 때 읍양(揖讓)하는 예가 있다.
 은력(殷曆) 정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날마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하였다. 이 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국내에 있을 때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그 위에 여우, 삵괭이, 원숭이, 희고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었다. 또 금,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통역이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앉아 손으로 땅을 집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 사람을 적몰하여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12배를 변상케 하였다.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질투하는 부인은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버려 썩게 하였다. 친정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 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것은 흉노의 풍습과 같다.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르며, 명마와 적옥, 담비와 원숭이 (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구슬의 크기는 대추만 하다. 활,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자기들이 옛날 (다른 곳에서)망명한 사람들이라 말한다. 성책은 모두 등글게 만들어 마치 감옥과 같다. 길에 다닐 때는 밤이나 낮이나 애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므로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전쟁을 하게되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여긴다. 적군이 있으면 제가들이 직접 전투를 하고 하호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내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100명 가량이나 된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곽(槨 덧널)은 사용하나 관(棺 널)은 쓰지 않는다. 

 위략(魏略):  그 나라의 습속은 다섯달 동안 초상을 지내는데 오래 둘수록 영예롭게 여긴다. 죽은 이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날 것과 익은 것을 함께 쓴다. 상주는 빨리 장사지내고 싶어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억지로 강권하여 언제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예절로 삼는다. 상을 입는 동안 남녀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가리개(面衣)를 착용한다. 반지나 패물 따위를 몸에서 떼어 놓은데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탁(公孫度)이 해동에서 세력을 키워 바깥 오랑캐(外夷)들을 위엄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 때 구려(고구려를 말함)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탁은 부여가 두 오랑캐 틈에 끼어 있는 것을 기화로 (동맹을 맺으려) 일족의 딸을 (부여왕에게) 시집보냈다.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적자가 없고 서자 마여(麻余)가 있었다. 위거가 죽자 제가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우가(牛加) 형(兄)의 아들 이름도 위거였는데 대사가 되어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 좋아하니 국인들이 그를 따랐다. 해마다 (위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시(正始: 위 제왕의 연호 240~249) 연간에 유주(幽州) 자사(刺史) 관구검( 丘儉)이 구려를 토벌하면서 현도태수 왕기(王 )를 부여에 파견하였다. 위거는 대가를 보내 교외에서 맞이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위거의) 계부(季父막내 삼촌)인 우가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계부 부자를 죽이고 재물을 적물하였다.
 옛 부여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꿔야 한다'거나 '죽여야 한다' 하였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인 여섯 살짜리 의려(依慮)를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 때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사용했으므로 언제나 현도군에 미리 갖다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공손연(公孫淵)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현도군의 창고에는 옥갑 한 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으로 만든 벽(璧) 규(珪) 찬(瓚) 등 여러 대를 전해오는 물건이 있어 대대로 보물로 여긴다. 노인들은 선대 (왕)께서 하사하신 것이라고 한다.

 위략 :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그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다. 아마도 예맥(濊貊)의 땅이었다가 부여가 그 가운데서 왕이 되었으므로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 말하는 것 같다.

 위략 :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여 왕이 죽이려 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런) 기운이 나에게 떨어져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 뒤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이라 여겨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하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땅을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남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로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리니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오지 못하였다. 동명은 부여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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