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를 경계로 삼고 남은 왜(倭)와 접경하였다. 면적이 사방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토착민으로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아 비단을 만들었다. 각각 우두머리(長帥)가 있어 세력이 강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臣智)라고 하고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며 성곽은 없었다.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 國), 신분고국(臣 沽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目支國 ?),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고(또는 점?)비리국(古(占?)卑離國), 신흔국(臣 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 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 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고랍국(古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국(不斯 邪國), 해지국(奚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 등 50여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통치한다. 신지에게는 신운견지보 안사축지분 신리아불례 구사진지렴(臣雲遣支報安邪 支 臣離兒不例狗邪秦支廉)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관직으로는 위솔선(魏率善), 읍군(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伯), 장(長)이 있다.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으로 나라를 빼앗겼다.

 위략(魏略) : 옛날 기자(箕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연(燕)이 스스로 높여 왕이 되어 동쪽으로 땅을 침략하려 함을 보고, 역시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며 병사를 일으켜 연을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大夫)인 예(禮)가 간하여 중지하였다.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이 계획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 뒤 자손들이 교만하고 사나워졌으므로 연은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서쪽을 공격하였다.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약해졌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아우름에 이르러 몽념(蒙恬)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 때 조선왕 부(否)는 진이 자기 나라를 습격할까 두려워 책략으로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왕이 된 지 20여 년에 진항(陳項: 진승과 항우)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연,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점차 준에게 도망갔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와서 살게 하였다. 한(漢)나라에서 노관(盧 )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로 경계를 이루었다.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하였다. 오랑캐의 복장(胡服)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가 항복하였다. 서쪽 변방에 살게 하여달라고 청하면서 중국에서 망명하는 사람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藩屛)으로 삼을 것을 설득하였다. 준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博士)로 삼고 규(圭)를 하사하여 백리의 땅을 봉해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만이 망명해 오는 사람을 꾀니 그 무리가 점점 많아졌다. 이에 위만은 준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말하엿다. "한나라 군사가 열 군데 길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지키고자 합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되돌아가 준을 공격하였다. 준은 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좌우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를 건너 한(韓)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하였다.

위략 :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그대로 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이 때문에 한씨(韓氏)라고 성을 썼다. 준은 해외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후손은 멸망하였으나 자금 한인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한나라 때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朝謁)하였다.

  

위략: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가 되었다. 그들 역시 조선에 조공하는 번국(蕃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의 지황(地皇) 연간(20-22)에 염사착(廉斯 )이 진한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다.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이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도망가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살던 읍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1명을 만났다. 그 사람의 말은 한인(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물어보니 남자가 말하였다. " 우리들은 한(漢)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호래(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 명이 나무를 벌채하다가 한(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 모두 머리를 깍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착이 물었다. " 나는 한나라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같이 가지 않겠느냐" 호래가 좋다고 말했다. 착은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含資縣)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하니, 군에서 착을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 호래 등을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 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착이 이에 진한에게 따졌다. "너희는 5백 명을 돌려보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 너희를 공격하겠다." 진한에서 말하였다. "5백 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다." 진한 사람 만 오천 명과 변한포(弁韓布) 만 오천 필을 내놓았다. 착은 그것을 거두어 곧바로 돌아갔다. 군에서는 착의 공을 표창하여 관책(冠 )과 전택(田宅)을 주었다. 또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안제 연광(延光) 4년(125)에 이으러 부역을 면제받았다.

 

 (후한)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기에는 한과 예과 강성하여 군, 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건안(建安 : 후한 헌제의 연호, 196-220)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한의 유민을 모아 군대를 일으키고 한과 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왔다. 이 뒤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복속되었다. 경초(景初 : 위 명제의 연호. 237-239)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을 주었다.
 풍속은 의책(衣 ) 입기를 좋아한다. 하호(下戶)들도 군에 인사드리려고 갈 때에 모두 의책을 빌려 입는다. 자신의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다 하여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주었다. 관리의 말을 통역하는 전하는데 다름이 있어 신지(臣智)와 한(韓)이 격분하여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당시 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준은 전사하였으나 2군은 마침내 한을 멸망시켰다. 그 풍속은 기강이 적다. 국읍(國邑)에는 우두머리(主帥)가 있지만 읍락에 섞여 살아 통제가 잘 되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 拜) 또한 없다. 초옥(草屋)에 토실(土室)을 지어 사는데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으며 문은 위에 있다. 온 식구가 그 속에서 함께 살며 장유(長幼), 남녀(男女)의 분별이 없다.  장례에는 널(棺)만 쓰고 덧널(槨)은 없다. 소, 말을 탈 줄 모르며, 모두 장례치를 때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금, 은, 비단(錦繡)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를 틀어 상투를 한 것이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다. 베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 안에 공사가 있거나 관가에서 성을 쌓을 때는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새끼줄로 한 발(丈)이나 되는 나무를 꿰매고 온종일 외치며 일을 한다. 아파하지도 않으며 그것으로 일 잘하고 건장한 것으로 여긴다. 해마다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모여서 노래부르고 춤추며 술을 마시는데 밤낮으로 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라 땅을 밟고 손발을 들었다 내렸다 한다. 그 가락의 율동이 마치 탁무(鐸舞)와 비슷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 뽑아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그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別邑)이 있어 소도(蘇塗)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도망해 온 사람이 그 가운데 들어가면 잡지 못했으므로 도둑질을 좋아한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쁨은 다름이 있다. 북방의 군과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조금 예속을 알지만 멀리 떨어진 지역은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별다른 진귀한 보배는 나지 않고 금수(禽獸), 초목은 중국과 같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크기가 배(梨)만하다. 또 세미계(細尾鷄)가 나는데 그 꼬리 길이는 모두 5척이 넘는다. 남자들은 때로 문신을 한다.  또 주호(州胡)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키가 조금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오직 가죽옷을 입으며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옷은 위만 있고 아래는 없기 때문에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진한(辰韓)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 마한이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라 하였다.
그 곳에는 성책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잔 돌리는 것(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나라 사람과 흡사하니 단지 연나라 제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그 중에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을)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 여섯 나라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누어졌다.

  

 변진(弁辰)

변진도 12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기저국(己 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해국( 奚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 미오야마국?), 여담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변진구사국(弁辰狗邪國 구야국?),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사국(弁辰安邪國 혹은 馬延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사로국(斯盧國), 우유국(優由國)이 있어서 변한과 진한의 합계 24국이나 된다. 이중에서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신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위략 : 그들은 옮겨온 사람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며 소와 말을 탈 줄 안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사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위략 :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 쌓아서 만들기 때문에 감옥과 흡사하다.

 

 나라에서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낙랑, 대방)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그 나라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과 같고 연주하는 음곡도 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곧 돌로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도 진한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라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보병 전투를 잘 하며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들의 풍속에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이 모두 길을 양보한다. 변진은 진한 사람과 뒤섞여 살며 성곽도 있다. 의복과 주택은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을 달라서 문의 서쪽에 모두 조왕신( 神)을 모신다.
 그 중에서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2국에 왕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장대하다. 의복은 청결하며 장발로 다닌다. 또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관습은 특히 엄준하다.

 

 (편찬자 진수는) 평한다.
사기 , 한서에서 조선과 양월(남만, 동월)을 기록하였고 동경(후한)시대에는 서강(西羌)에 대해 찬록하였다. 위나라 때부터 흉노가 쇠약해지자 다시 오환과 선비가 나타났다. 이어 동이에 이르러서는 사신이 늘 왕래하여 사건에 따라 기술하였으니 어찌 범상한 일이라 하겠는가.

Posted by 빈구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