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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열전

고대 2009. 2. 27. 18:00

사기(史記) 권 115   열전(列傳) 제 15   조선(朝鮮)

조선왕 만(滿- 위만을 말함)은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 전성기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을 멸망시킨 뒤 요동의 바깥 변방까지 소속시켰다.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 : 압록강, 청천강, 태자하(太子河), 대릉하(大凌河), 난하( 河)설로 의견이 분분함-필자주)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부속시켰다.
연왕 노관(盧 )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만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명을 보아 상투를 틀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갔다.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땅으로 비어 있는 상하장(上下 )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오랑캐(蠻夷) 및 옛 연(燕), 제(齊)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王儉)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때가 마침 효혜(孝惠), 고후(高后)의 시대(한고조가 죽은 뒤 여태후가 혜제를 섭정하던 기원전 194-188년 무렵)로서 천하가 안정되었다. 요동태수는 곧 만을 외신(外臣)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였다. 국경 밖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여러 오랑캐의 군장이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었다. 그 주변의 소읍(小邑)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사방 수천리가 되었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는 꾀어낸 한나라 망명자 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다. 천자에게 들어와 뵙지 않을뿐더러 진번 주변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元封 : 한무제의 연호- 필자주) 2년(기원전 109년- 필자주), 한나라는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를 꾸짖고 달래었다. 그러나 끝내 천자의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에서 마부를 시켜 배웅 나온 조선의 패왕(稗王, 비왕(裨王)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장(長)을 찔러 죽였다. (패수를) 건너 요새로 도망간 뒤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천자가 그 공을 기려 하에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의 벼슬을 내렸다. 조선이 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 공격해 하를 죽였다. 천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을 치게 하였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였다. 군사 5만으로 좌장군 순체(荀 )를 요동에 출격시켜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의 부하 장수인 다(多)가 요동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정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였다. 군사는 흩어지고 다도 도망하여 왔으므로 법에 따라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누선 장군은 제나라 병사 7천 명으로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성을 나와 누선을 쳤다. 누선군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누선)장군 양복은 많은 군사를 잃고 10여 일을 산중에 숨어살다가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서군(浿水西軍)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 없었다.
천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겼다. 위산(衛山)에게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 숙여 사과하였다.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두 장군이 신을 속여 죽일까 두려웠습니다. 이제 신절(信節- 거짓없는 표적)을 보았으므로 항복을 청합니다."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 필을 바치면서 또한 군량미를 내어 주었다. 무리 만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를 건너려고 할 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였다.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리라고 명하시오" 태자 또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였다.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산이 돌아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자는 산을 죽였다.
좌장군이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 또한 합세하여 성을 남쪽에 웅거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본디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았는데 연과 대(代)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다.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 장군은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바다로 출정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를 잃었다.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곤욕을 치른 패잔병들이라 모두 싸움을 두려워하였다. 장군은 부끄럽게 생각하며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하였다.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의 대신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을 약속하였다. 말만 오고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고 있지 못하였다. 좌장군이 여러 차례 누선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을 화해할 약속을 급히 이루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기다렸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이 때문에 두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좌장군은 속으로 ' 누선이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데다가 자금은 사사로이 조선과 잘 지내고 있으며, 조선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반역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다. 그러나 함부로 입밖에 내지는 못하였다.
천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수들이 (일을) 이루지 못하므로 위산을 시켜 우거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여 우거가 태자까지 보냈다. 그런데도 산이 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계교가 서로 달라 마침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두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도 역시 어긋나고 달라서 오래도록 결단치 못하고 있다."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리토록 하였다. 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하였다. "조선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 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누선이 여러 차례 싸우러 나오지 않은 것과 평소 생각을 낱낱이 고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이와 같으니 (누선을) 체포하지 않으면 크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 혼자가 아니라 조선과 함께 우리 군사를 멸할 것입니다." 수도 이를 옳게 여기고 부절(符節-대나무로 만든 신표)로 누선을 불러 좌장군 진영에 오게 하였다. 좌장군 휘하를 시켜 곧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천자가 수를 죽였다.
좌장군이 양군을 합친 뒤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과 상 한음(韓陰), 니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 )이 서로 모의하였다.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있다. 좌장군 혼자 군사를 합해 전투는 더욱 맹렬해졌다. 맞서 싸우기 두려운데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음, 겹, 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노인은 가는 길에 죽었다. 원봉 3년 여름,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한에) 반대하여 다시 군리(軍吏-군대에 속한 관리?, 군대와 관리? 어느 것인지 영상이는 잘 모르겠네요)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상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죽이게 하였다.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삼을 봉해 홰청후( 淸侯), 음은 추저후(萩 后), 겹은 평주후(平州侯), 장은 기후(幾侯)로 삼았다. 최는 아버지가 죽었으나 큰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溫陽侯 -한서에는 저양후(沮陽侯로 나옴)로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 공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략을 어긋나게 한 죄로 기시(棄市 - 죄인의 목을 베어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는 형벌)하였다. 누선장군은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洌口 - 열수의 하구, 열수는 대동강설, 요하설이 있음)에 이르렀으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함에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었다가 많은 병사를 잃어버렸으므로 죽이는 것이 마땅하나 속전(贖錢- 죄을 면하려고 바치는 돈)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우거는 험고(險固)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을 당하고 죄에 걸렸다. 번우(番禹 - 광주(廣州)의 옛 이름)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을 다투다 (공손)수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결국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제후가 된 사람이 없었다.
Posted by 빈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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