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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27 고구려 건국신화(삼국사기) 1
  2. 2009.02.27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9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이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빌었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았다. 금빛 개구리[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기르며 금와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녀를 따라 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다섯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으며,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는 들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그것을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의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아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여러 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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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夫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戶數)는 3만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 물(澗水)를 식수로 한다. 농사지을 좋은 땅이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은 음식을 아껴 먹는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 벼슬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 衣), 선인(先人)이 있는데,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동이의 옛말에 따르면,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한다.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족(族)이 있다.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졌다.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朝服)과 의책(衣 )을 받아갔으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 溝 )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관직을 설치할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자는 모두 고추가로 불린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 비록 왕은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嫡統)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 절노부도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대가(大加)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다. 그 명단은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마치 중국의 경(卿인)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것으로, 모임이 있을 때 좌석 차례에선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위치에는 앉지 못한다. 나라 안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앉아서 먹는 인구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나라 안의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부경( 京)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 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다. 길을 걸을 때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쓴다. (중국의) 책과 비슷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이한다. 나라의 동쪽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낸다.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풍속은 혼인할 때 말로 미리 정한다. 여자의 집에서 집 뒤에 작은 별채를 짓고 서옥( 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고 궤배( 拜-무릎을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신부 부모가 그 때서야 작은 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금,은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몸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모두 복속되었다.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구려는 대수(大水: 압록강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다.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작은 강이 있다.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小水:  佳江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 곳에서 좋은 활이  생산된다.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왕망(王莽) 초년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를 징벌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억지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을 넘어 도망한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살해되었다. 주, 군, 현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도( )에게 전가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우에게 칠 것을 명하였다. 우는 구려후 도를 만나자고 꾀어 목을 베고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삼국사기 유리왕 31년 기사에 따르면 장수 연비(延丕)의 목이 베이었다고 함)  왕망이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 8년(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이 보인다. 상제( 帝), 안제(安帝) 연간(106-124년)에 구려왕 궁(宮 : 태조왕)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므로 디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고 여겨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궁이 몰래 군대를 보내 현도를 공격하였다. 후성(侯城)을 불사르고 요수(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볍게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다 패하여 죽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삼국사기에는 백고가 태조왕의 아우 신대왕이다) 순제(順帝), 환제(桓帝) 연간(126-167)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였다.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熹平 : 영제의 연호, 172-177) 연간에 백고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공손탁을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해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때부터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헌제(獻帝)의 연호. 196-219)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각 하호 3만여 명을 이끌고 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가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다. 지금 고추가 박위거( 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공격하므로 현도와 요동이 힘을 합쳐 반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위궁(位宮이라 하였는데 이이모가 죽은 뒤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지금의 고구려왕 궁(동천왕) 이 바로 이 사람이다. 증조의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장정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자마자 역시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른다.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경초(景初: 위 명제(明帝) 연호. 237-239) 2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정시(正始: 위 제왕(齊王)의 연호. 240-248) 3년에 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5년에는 유주자사 관구검( 丘儉)에게 격파당하였다. 그 때의 사실이 검의 열전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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