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夫餘)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戶數)는 3만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다.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 물(澗水)를 식수로 한다. 농사지을 좋은 땅이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은 음식을 아껴 먹는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다. 벼슬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 衣), 선인(先人)이 있는데,  신분의 높낮이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동이의 옛말에 따르면,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한다.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디 다섯 족(族)이 있다.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졌다.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악공(樂工)을 하사하였다.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조복(朝服)과 의책(衣 )을 받아갔으며, (현도군의) 고구려령(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 溝 )라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관직을 설치할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자는 모두 고추가로 불린다.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 비록 왕은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嫡統)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따로 제사를 지낸다. 절노부도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대가(大加)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다. 그 명단은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마치 중국의 경(卿인)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것으로, 모임이 있을 때 좌석 차례에선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위치에는 앉지 못한다. 나라 안의 대가(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앉아서 먹는 인구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나라 안의 촌락마다 저물어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부경( 京)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 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다. 길을 걸을 때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쓴다. (중국의) 책과 비슷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수신(隧神)을 맞이한다. 나라의 동쪽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낸다.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자리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풍속은 혼인할 때 말로 미리 정한다. 여자의 집에서 집 뒤에 작은 별채를 짓고 서옥( 屋)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 도착하여 자기 이름을 밝히고 궤배( 拜-무릎을 꿇고 절함)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거듭하면 신부 부모가 그 때서야 작은 집에 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이 음란하여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금,은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몸이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와 동예(東濊)가 모두 복속되었다. 또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구려는 대수(大水: 압록강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다.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가는 작은 강이 있다.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小水:  佳江인 듯)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 곳에서 좋은 활이  생산된다.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왕망(王莽) 초년에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를 징벌하게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억지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을 넘어 도망한 뒤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살해되었다. 주, 군, 현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도( )에게 전가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우에게 칠 것을 명하였다. 우는 구려후 도를 만나자고 꾀어 목을 베고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삼국사기 유리왕 31년 기사에 따르면 장수 연비(延丕)의 목이 베이었다고 함)  왕망이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 8년(32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이 보인다. 상제( 帝), 안제(安帝) 연간(106-124년)에 구려왕 궁(宮 : 태조왕)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므로 디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고 여겨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궁이 몰래 군대를 보내 현도를 공격하였다. 후성(侯城)을 불사르고 요수(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볍게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다 패하여 죽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삼국사기에는 백고가 태조왕의 아우 신대왕이다) 순제(順帝), 환제(桓帝) 연간(126-167)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新安)과 거향(居鄕)을 노략질하였다.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년)에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熹平 : 영제의 연호, 172-177) 연간에 백고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公孫度)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優居)와 주부 연인(然人)을 파견하여 공손탁을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해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때부터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流亡)한 호족(胡族)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建安: 헌제(獻帝)의 연호. 196-219)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성읍과 촌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加)와 함께 각각 하호 3만여 명을 이끌고 강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가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오늘날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아들은 구려에 계속 머물렀다. 지금 고추가 박위거( 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공격하므로 현도와 요동이 힘을 합쳐 반격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위궁(位宮이라 하였는데 이이모가 죽은 뒤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지금의 고구려왕 궁(동천왕) 이 바로 이 사람이다. 증조의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장정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자마자 역시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부른다.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경초(景初: 위 명제(明帝) 연호. 237-239) 2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도왔다. 정시(正始: 위 제왕(齊王)의 연호. 240-248) 3년에 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5년에는 유주자사 관구검( 丘儉)에게 격파당하였다. 그 때의 사실이 검의 열전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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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부여(夫餘)는 장성(長成: 현재의 만리장성이 아닌 연, 진 시대 장성) 북쪽에 있는데, 현도(玄   )에서 천리쯤 떨어져 있다.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 婁), 서로 선비(鮮卑)와 접해 있으며, 북쪽에 약수(弱水:흑룡강)가 있다. 사방 2천리가 되며 호수는 8만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정주 생활을 하며 궁실과 창고 및 감옥을 갖추고 있다. 산릉(山陵)과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 적당하지만 오과(五果)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 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노략질 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군왕이 있고 모두 여섯 가축 이름으로 관명을 정하여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 加), 구가(狗加), 대사(大使, 혹은 犬使), 대사자(大使者, 혹은 犬使者), 사자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豪民)이 있고 하호(下戶)라 불리는 백성은 모두 노복이 되었다. (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  다른 판본에서는 名이 民으로 되어 있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제가(諸家)들은 별도로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 가이며, 작은 곳은 수백가였다.
 음식을 먹고 마실 때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회합을 가질 때에는 술잔을 주고(拜爵) 닦는(洗爵)하는 예(禮)가 있고, 출입할 때 읍양(揖讓)하는 예가 있다.
 은력(殷曆) 정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날마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 하였다. 이 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국내에 있을 때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그 위에 여우, 삵괭이, 원숭이, 희고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었다. 또 금,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통역이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앉아 손으로 땅을 집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 사람을 적몰하여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12배를 변상케 하였다.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질투하는 부인은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버려 썩게 하였다. 친정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 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것은 흉노의 풍습과 같다.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르며, 명마와 적옥, 담비와 원숭이 (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구슬의 크기는 대추만 하다. 활,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자기들이 옛날 (다른 곳에서)망명한 사람들이라 말한다. 성책은 모두 등글게 만들어 마치 감옥과 같다. 길에 다닐 때는 밤이나 낮이나 애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므로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전쟁을 하게되면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친다.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여긴다. 적군이 있으면 제가들이 직접 전투를 하고 하호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내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100명 가량이나 된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곽(槨 덧널)은 사용하나 관(棺 널)은 쓰지 않는다. 

 위략(魏略):  그 나라의 습속은 다섯달 동안 초상을 지내는데 오래 둘수록 영예롭게 여긴다. 죽은 이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날 것과 익은 것을 함께 쓴다. 상주는 빨리 장사지내고 싶어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억지로 강권하여 언제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예절로 삼는다. 상을 입는 동안 남녀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가리개(面衣)를 착용한다. 반지나 패물 따위를 몸에서 떼어 놓은데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탁(公孫度)이 해동에서 세력을 키워 바깥 오랑캐(外夷)들을 위엄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 때 구려(고구려를 말함)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탁은 부여가 두 오랑캐 틈에 끼어 있는 것을 기화로 (동맹을 맺으려) 일족의 딸을 (부여왕에게) 시집보냈다.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적자가 없고 서자 마여(麻余)가 있었다. 위거가 죽자 제가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우가(牛加) 형(兄)의 아들 이름도 위거였는데 대사가 되어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 좋아하니 국인들이 그를 따랐다. 해마다 (위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정시(正始: 위 제왕의 연호 240~249) 연간에 유주(幽州) 자사(刺史) 관구검( 丘儉)이 구려를 토벌하면서 현도태수 왕기(王 )를 부여에 파견하였다. 위거는 대가를 보내 교외에서 맞이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위거의) 계부(季父막내 삼촌)인 우가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계부 부자를 죽이고 재물을 적물하였다.
 옛 부여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꿔야 한다'거나 '죽여야 한다' 하였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인 여섯 살짜리 의려(依慮)를 왕으로 세웠다.
 한나라 때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사용했으므로 언제나 현도군에 미리 갖다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공손연(公孫淵)이 죽임을 당한 뒤에는 현도군의 창고에는 옥갑 한 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으로 만든 벽(璧) 규(珪) 찬(瓚) 등 여러 대를 전해오는 물건이 있어 대대로 보물로 여긴다. 노인들은 선대 (왕)께서 하사하신 것이라고 한다.

 위략 :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그 도장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다. 아마도 예맥(濊貊)의 땅이었다가 부여가 그 가운데서 왕이 되었으므로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 말하는 것 같다.

 위략 :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다.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여 왕이 죽이려 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런) 기운이 나에게 떨어져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 뒤 아들을 낳았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다.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제의 아들이라 여겨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하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땅을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남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로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이 건넌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리니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오지 못하였다. 동명은 부여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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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8조 법

고대 2009. 2. 27. 18:03

은(殷)나라의 도가 쇠퇴하자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 누에치기, 길쌈을 가르치고 낙랑(樂浪), 조선 백성의 범금(犯禁) 8조를 만들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시킨다. 도둑질을 한 자는 남자일 때는 그 집의 종놈(奴)으로 만들고, 여자일 때는 종년(婢)으로 만든다. 스스로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50만을 내게 한다. 그러나 비록 (노비를) 면하여 평민이 되더라도 사람들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여자는 배필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였다. 이 때문에 그 백성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으므로 문단속을 하지 않았으며, 부인들은 정숙하고 음란하지 않았다. .....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밤에 도둑질을 한 까닭에 민심이 점차 각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점차 많아져서 60여 조항에 이르렀다.


                                         한서(漢書) 권 28 하,   지리지, 제8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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